2018.7.30
그리스도가 중심에 계십니까?
이 기도 목사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I am crucified with Christ: neverthless I live; yet not I, but Christ liveth in me: and the life which I now live in the flesh I live by the faith of the Son of God, who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 (Galatians 2:20, KJV)
미국의 어느 경찰서에 이런 표어가 붙어 있다고 합니다. “One is for all and all is for one”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 이 말은 경찰관 한 사람이 잘하면 모든 사람을 살리고 모든 사람은 결국 한 사람을 위해 있다는 말입니다. 경찰관의 사명을 강조한 말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경찰관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닙니다. 모든 영적 원리에도 해당되고 성경에도 해당됩니다. 성경 한 구절이 곧 성경 전체입니다. 그리고 성경 전체가 성경 한 구절로 요약된다면 갈2:20로 요약되고 갈2:20은 곧 모든 성경입니다.
어떤 사람이 범죄하고 도망갔습니다. 결국 잡혔는데 그 이유가 단순합니다. 그가 방에 남긴 자국과 그의 운동화에 남아 있는 땀의 DNA가 일치했다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은 땀 한 방울이 그 사람 전체일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갈2:20은 크게 두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앞부분은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하신 일입니다. 뒷부분은 내가 그리스도를 위해 하는 일입니다. 앞부분에서 그리스도는 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지금은 내 안에 계십니다. 뒷부분에서 그러므로 이제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 삽니다.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하신 일과 내가 그리스도를 위해 할 일입니다. 두 가지입니다.
칼빈이 쓴 기독교강요를 두 마디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나를 알라” 그것이 성경의 요약입니다. 이라는 소설에서 주인공 윌리 로먼 부인이 자기 남편의 묘비를 이렇게 썼습니다. “그는 일생 자기가 누구인지 몰랐다” 사람이 죽는 것도 억울한데 죽을 때 자기가 누군지 평생 몰랐다고 묘비에 쓴다는 것은 얼마나 억울한 일입니까? 그러나 실제로 인간은 죽을 때까지 자기가 누군지 잘 모르고 삽니다.
우리는 항상 두 가지 본질적인 질문을 생각해야 합니다. 첫째, “하나님이 누구인가?” 둘째, “나는 누구인가?” 갈2:20은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성경적인 대답입니다. 첫째, “하나님이 누구입니까?”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지금은 내 안에 살아 계신 분입니다. 둘째, “나는 누구입니까?”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죽으신 그 분을 위해 평생 믿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두 질문의 한 가운데 가운데 계신 분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누구냐 라는 질문의 중심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누구냐 라는 질문의 중심에도 서 있습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의 중심에 계신 분, 어떤 분은 이것을 거울을 비유로 설명합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비춰주는 거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냐 물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봅니다. 사람이 누구냐 물을 때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봅니다. 우리가 직접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볼 수도 없고 보이지도 않습니다. 거울을 통해 바라 봐야 보입니다. 그 거울이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보고, 그리스도를 통해 사람을 보는 것이 성경입니다.
갈2:20을 통해 하나님의 소원은 우리가 우리 주변에서 서성거리게 했던 그리스도를 이제 우리 삶과 신앙의 중심에 놓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2:20은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세 가지 중심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성경의 중심. 둘째는 교회의 중심, 그리고 셋째는 우리 삶과 죽음의 중심입니다.
그리스도는 성경의 중심입니다. 성경은 마치 바다와 같은 책입니다. 바다는 모든 물을 다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너무 크기 때문에 가끔 종교의 집대성, 모든 사상의 총화라고 생각됩니다. 실제로 성경에는 주요 고대 근동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들의 종교, 사상, 신화도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역사가 있습니다. 그 시대가 가졌던 규범, 율법, 문화, 종교, 삶, 가치관을 다 품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품되 한 가지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행하셨던 구원의 드라마입니다. 성경은 약 1600년 동안 40여명의 각기 다른 사람이 썼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방향은 일치합니다. 예수님입니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성경의 중심은 예수님입니다. 마틴 루터가 말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가 입었던 통옷이다” “성경은 그리스도가 누어있는 구유이다” 전체로 하나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몸이요 한 옷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말씀했습니다. 요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알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에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라” 예수님이 성경의 중심입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중심입니다.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의 원리는 교회생활에도 적용됩니다. 교회 생활의 가장 큰 은혜는 예수님이 교회의 중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에서 벗어나면 교회는 세상보다 못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교회 나옵니다. 처음에는 상당한 기대를 하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실망이 생겼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본질은 하나입니다. 예수님이 교회 생활의 중심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오면 세 방향을 보아야 합니다. 위와 옆과 밖입니다. 위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 분을 바라보는 눈으로 옆에 있는 사람을 바라보고, 밖에 있는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끊임없이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종교개혁은 중세 캐톨릭 교회가 잃어버린 교회의 주인을 회복하자는 운동이었습니다. “교회의 주인은 교황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목숨 걸고 예수님이 교회의 주인이라고 강조하며 개신교회가 탄생했지만 지금 우리 교회의 모든 조직과 교리와 생활 속에 예수님이 중심에 계신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나의 신앙과 삶의 중심입니다. 우리 삶과 죽음의 모든 영역에서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것을 바울은 빌1:20에서 말합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참된 신앙은 우리 삶의 모든 부분에 예수님이 중심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가정의 중심에, 직장생활의 중심에, 까다로운 상관을 만나 마음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닐 때도, 사업으로 고민할 때도, 그때 붙들 말씀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든지 죽든지”입니다.
브라질의 리우 데 자네이루에 거대한 그리스도의 조각상이 있습니다. 해발 700미터 산위에 세워진 그리스도 조각상은 키가 27미터, 무게는 1320톤, 조각상의 머리만 2.7미터이며, 좌우로 쫙 펼친 두 팔의 길이는 무려 19미터나 됩니다. 그런데 이 조각상은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는 눈이 없습니다. 눈 모양은 있지만 시력이나 눈동자는 없습니다. 두 번째 특징은 놀랍게도 심장이 외투 바깥에 있다는 것입니다. 보통 심장은 몸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 조각은 심장이 밖으로 나와 있습니다.
왜 그리스도가 시력이 없고 심장이 밖에 나와 있을까요? 눈동자가 없는 것은 사람들의 죄를 보고 싶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닌지? 차라리 인간의 죄를 보지 않으려고 눈을 감으신 것은 아닌지? 심장이 밖으로 나와 있는 것은, 안에 두기에는 너무 가슴이 아파 밖으로 나온 것이 아닌지? 세상을 향한 사랑이 너무 뜨거워 안에 둘 수 없어서는 아닌지? 세상을 사랑하여 차마 그 죄를 볼 수 없었던 그리스도의 눈, 세상을 사랑하여 심장이
2018.7.30
그리스도가 중심에 계십니까?
이 기도 목사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I am crucified with Christ: neverthless I live; yet not I, but Christ liveth in me: and the life which I now live in the flesh I live by the faith of the Son of God, who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 (Galatians 2:20, KJV)
미국의 어느 경찰서에 이런 표어가 붙어 있다고 합니다. “One is for all and all is for one”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 이 말은 경찰관 한 사람이 잘하면 모든 사람을 살리고 모든 사람은 결국 한 사람을 위해 있다는 말입니다. 경찰관의 사명을 강조한 말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경찰관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닙니다. 모든 영적 원리에도 해당되고 성경에도 해당됩니다. 성경 한 구절이 곧 성경 전체입니다. 그리고 성경 전체가 성경 한 구절로 요약된다면 갈2:20로 요약되고 갈2:20은 곧 모든 성경입니다.
어떤 사람이 범죄하고 도망갔습니다. 결국 잡혔는데 그 이유가 단순합니다. 그가 방에 남긴 자국과 그의 운동화에 남아 있는 땀의 DNA가 일치했다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은 땀 한 방울이 그 사람 전체일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갈2:20은 크게 두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앞부분은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하신 일입니다. 뒷부분은 내가 그리스도를 위해 하는 일입니다. 앞부분에서 그리스도는 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지금은 내 안에 계십니다. 뒷부분에서 그러므로 이제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 삽니다.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하신 일과 내가 그리스도를 위해 할 일입니다. 두 가지입니다.
칼빈이 쓴 기독교강요를 두 마디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나를 알라” 그것이 성경의 요약입니다. 이라는 소설에서 주인공 윌리 로먼 부인이 자기 남편의 묘비를 이렇게 썼습니다. “그는 일생 자기가 누구인지 몰랐다” 사람이 죽는 것도 억울한데 죽을 때 자기가 누군지 평생 몰랐다고 묘비에 쓴다는 것은 얼마나 억울한 일입니까? 그러나 실제로 인간은 죽을 때까지 자기가 누군지 잘 모르고 삽니다.
우리는 항상 두 가지 본질적인 질문을 생각해야 합니다. 첫째, “하나님이 누구인가?” 둘째, “나는 누구인가?” 갈2:20은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성경적인 대답입니다. 첫째, “하나님이 누구입니까?”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지금은 내 안에 살아 계신 분입니다. 둘째, “나는 누구입니까?”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죽으신 그 분을 위해 평생 믿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두 질문의 한 가운데 가운데 계신 분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누구냐 라는 질문의 중심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누구냐 라는 질문의 중심에도 서 있습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의 중심에 계신 분, 어떤 분은 이것을 거울을 비유로 설명합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비춰주는 거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냐 물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봅니다. 사람이 누구냐 물을 때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봅니다. 우리가 직접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볼 수도 없고 보이지도 않습니다. 거울을 통해 바라 봐야 보입니다. 그 거울이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보고, 그리스도를 통해 사람을 보는 것이 성경입니다.
갈2:20을 통해 하나님의 소원은 우리가 우리 주변에서 서성거리게 했던 그리스도를 이제 우리 삶과 신앙의 중심에 놓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2:20은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세 가지 중심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성경의 중심. 둘째는 교회의 중심, 그리고 셋째는 우리 삶과 죽음의 중심입니다.
그리스도는 성경의 중심입니다. 성경은 마치 바다와 같은 책입니다. 바다는 모든 물을 다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너무 크기 때문에 가끔 종교의 집대성, 모든 사상의 총화라고 생각됩니다. 실제로 성경에는 주요 고대 근동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들의 종교, 사상, 신화도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역사가 있습니다. 그 시대가 가졌던 규범, 율법, 문화, 종교, 삶, 가치관을 다 품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품되 한 가지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행하셨던 구원의 드라마입니다. 성경은 약 1600년 동안 40여명의 각기 다른 사람이 썼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방향은 일치합니다. 예수님입니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성경의 중심은 예수님입니다. 마틴 루터가 말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가 입었던 통옷이다” “성경은 그리스도가 누어있는 구유이다” 전체로 하나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몸이요 한 옷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말씀했습니다. 요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알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에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라” 예수님이 성경의 중심입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중심입니다.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의 원리는 교회생활에도 적용됩니다. 교회 생활의 가장 큰 은혜는 예수님이 교회의 중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에서 벗어나면 교회는 세상보다 못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교회 나옵니다. 처음에는 상당한 기대를 하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실망이 생겼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본질은 하나입니다. 예수님이 교회 생활의 중심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오면 세 방향을 보아야 합니다. 위와 옆과 밖입니다. 위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 분을 바라보는 눈으로 옆에 있는 사람을 바라보고, 밖에 있는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끊임없이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종교개혁은 중세 캐톨릭 교회가 잃어버린 교회의 주인을 회복하자는 운동이었습니다. “교회의 주인은 교황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목숨 걸고 예수님이 교회의 주인이라고 강조하며 개신교회가 탄생했지만 지금 우리 교회의 모든 조직과 교리와 생활 속에 예수님이 중심에 계신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나의 신앙과 삶의 중심입니다. 우리 삶과 죽음의 모든 영역에서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것을 바울은 빌1:20에서 말합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참된 신앙은 우리 삶의 모든 부분에 예수님이 중심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가정의 중심에, 직장생활의 중심에, 까다로운 상관을 만나 마음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닐 때도, 사업으로 고민할 때도, 그때 붙들 말씀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든지 죽든지”입니다.
브라질의 리우 데 자네이루에 거대한 그리스도의 조각상이 있습니다. 해발 700미터 산위에 세워진 그리스도 조각상은 키가 27미터, 무게는 1320톤, 조각상의 머리만 2.7미터이며, 좌우로 쫙 펼친 두 팔의 길이는 무려 19미터나 됩니다. 그런데 이 조각상은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는 눈이 없습니다. 눈 모양은 있지만 시력이나 눈동자는 없습니다. 두 번째 특징은 놀랍게도 심장이 외투 바깥에 있다는 것입니다. 보통 심장은 몸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 조각은 심장이 밖으로 나와 있습니다.
왜 그리스도가 시력이 없고 심장이 밖에 나와 있을까요? 눈동자가 없는 것은 사람들의 죄를 보고 싶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닌지? 차라리 인간의 죄를 보지 않으려고 눈을 감으신 것은 아닌지? 심장이 밖으로 나와 있는 것은, 안에 두기에는 너무 가슴이 아파 밖으로 나온 것이 아닌지? 세상을 향한 사랑이 너무 뜨거워 안에 둘 수 없어서는 아닌지? 세상을 사랑하여 차마 그 죄를 볼 수 없었던 그리스도의 눈, 세상을 사랑하여 심장이